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야생 치자 나무와 나눈대화

가행 2013. 10. 11. 15:16

언젠가 참빛 부모님,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글 하나 올립니다.

 

작년 이맘때 우리반 아이들과 캠핑 다녀 온 후 정리 했던 글인데, 작년 겨울 학급 아이들과 어려움을 겪으며 이 글을 떠올리곤 마음을 갈무리 할 수 있었지요...  작년 한해 겪었던 많은 일들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짜맞춰지는 느낌이랄까...

 

 

야생 치자 나무와 나눈 대화

 

610일 일요일 하늘이 맑고 바람이 시원하다.

학급 아이들 몇 명과 부모님들의 캠핑에 초대받아 경주의 어느 한적한 야영장에서 밤을 보내고 현란한 새소리에 잠이 깼다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가 참 화려하고 정겹다. 아직은 모두들 잠을 자고 있는 이른 아침, 새소리, 물소리에 이끌려 산책을 나섰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개울 위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뭇가지들 사이를 비집고 개울 위쪽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향긋한 향기가 느껴진다. 저만치 야생 치자꽃이 하얗고 노랗게 향기를 뿜어대고 있다. 그 향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다가가니 치자나무 가지에 온통 검정 비닐이 마구 엉겨 붙어 있다. 밭에서 쓰는 길다란 비닐...

마음이 아프다....

얼른 도와줘야 겠다는 생각에 치자나무에 엉겨 붙은 검은 비닐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바깥쪽에 얽혀있는 비닐은 금방 쉽게 뜯어내어 졌지만, 비닐은 치자나무 가지 사이사이 깊이 얽혀 있다. 안쪽에 얽혀 있는 비닐들을 뜯어내노라니 노랗게 익은 꽃잎이며 나뭇잎들이 투둑 떨어지고, 여린 가지들도 비닐과 함께 뚝뚝 꺾인다.

 

치자 나무 : 아야, 아프단 말예요, 좀 살살 해 줄 순 없어요?

 

: , 아팠나요? 미안해요. 하지만 난 당신을 아프게 하려는게 아니라 도와주려는 거예요. 이봐요, 이렇게 시커먼 비닐이 당신을 옭아 매고 있었잖아요. 그러니 좀 아파도 참으세요. 너무 심하게 얽혀 있어서 어쩔 수 없어요.

 

치자 나무: 당신이 날 도와주려는 건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내게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 아세요?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 그런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어요... , 단지 내 눈에 보이는 이 검은 비닐이 당신에게 너무 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 같아서 그걸 걷어내 주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하지 못했네요.

 

치자나무 : 그래요, 이 검은 비닐들 때문에 가지를 제대로 뻗을 수도, 숨을 쉬기도 쉽지 않아요. 하지만, 이 검은 비닐들은 꽤 오랜 시간을 여기에 이렇게 얽혀 있어서, 다른 한 편으론 나의 한 부분이 되어 있기도 해요, 그래서 당신이 검은 비닐을 걷어내는 동안 내 가지와 꽃들도 함께 떨어져 나가고 나는 또 다른 아픔에 힘겨워요.

 

: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이 검은 비닐들은 당신에게 분명히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걷어내야만 할 것 같아요. 지금 이 비닐을 걷어내는 과정이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참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이 고통의 과정을 거쳐 당신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테니까요...

 

치자나무 : 그건, 당신의 생각이구요. 전 지금 아파요. 당신은 날 도와준다고 생각하지만, 난 지금 고통 받고 있다구요. 당신이 정말 날 도와주고 싶다면, 당신의 손길을 멈추고 나를 찬찬히 들여다 봐주세요. 내 가지가 어디로 뻗어 있는지, 어디 어디에 내 잎과 꽃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이 검은 비닐은 그 사이사이에 어떻게 얽혀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 봐 준다면, 내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고 나를 도와 줄 수 있을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뭇가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조심조심 얽힌 실타래를 풀듯이 치자나무에 얽힌 비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시간이 몇 배로 들었고 나도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잠든 일행들이 깨어날 시간도 되어 가는 것 같고...

 

: 하지만, 이렇게 천천히 조심조심 해서는 당신에게 얽힌 비닐을 다 걷어낼 수 없을 것 같아요. 난 또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치자나무 : 왜 꼭 당신이 내게 얽힌 비닐을 모두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저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만큼, 당신의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도와주고 가도 좋아요. 당신이 결국 내게 얽힌 비닐을 다 걷어 내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과 세심한 눈길을 통해 내게 전해진 배려와 사랑만으로도 나는 충분해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하고 행복하니까요. 때론 바람과 햇살이, 때론 또 다른 당신이 그렇게 조금씩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면서 언젠가 나는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거예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조심스레 치자나무의 비닐을 걷어내었다. 비닐은 조각조각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너무 깊숙이 박힌 비닐은 도저히 뜯어낼 수 없었다.

 

: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치자나무 : , 정말 고마워요.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 아니예요, 제가 오히려 감사해요. 당신과 대화 나눌 수 있어 정말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예요. 당신을 통해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나는 지금껏 아이들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단지 나의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려 애써 왔던 건 아닐까? 내가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도와주려 애써왔던 지난 시간들 속에서 힘겨워하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내가 진정 그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긴 했던 걸까... 오히려 아이들에게 준 상처들이 더 크진 않았는지...

이젠 나의 교육관, 이상, 욕심... 이런 것들 내려놓고, 좀 더 힘을 빼고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지금 바로 잡아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출처 : 부산참빛학교
글쓴이 : 예얼맘 원글보기
메모 :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알만한 사랑  (0) 2015.02.05
예슬이 똥누는 이야기  (0) 2015.02.05
보글보글 마법의 수프 대본  (0) 2014.06.17
성공회 문학상 응모작  (0) 2013.12.05
2013년 10월 11일 오후 02:28  (0) 2013.10.11